animal nitrate
다소 길었던 투어가 끝나고 텅 빈 회장에서 샴페인을 터트렸다. 참석한 사람들은 밴드 네 명과 세션 한 명, 스태프들, 각자의 애인도 있었다.
성실한 드러머 태용도 마찬가지로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관계의 여성을 초대했다. 세 번의 앵콜에 지친 얼굴로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디의 누구래.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유타가 눈을 살짝 휘어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아, 또 내 그루피랑 사귀는구나.
태용과 만나기 시작한 사람은 얼마안가 곧 유타와 잔다.
라이브하우스 좀 다니는 사람들 끼리는 다 아는 저질스러운 소문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완전히 사실이였다.
유타가 작정하고 태용과 연애 전제의 관계를 맺는 족족 상대를 꼬셔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주장은 그렇다.
만약 그렇다면 왠지 소름끼치잖아.
그럼 왜 그런 심사 꼬인 짓을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매번 "음 어쩌다보니까" 하면서 얼버무렸고 당사자인 태용은 유타에게 아무것도 캐묻지않았다. 유타에게 48시간 내외로 태용은 상대와 헤어졌다. 떠도는 말은 점점 "유타와 자고싶으면 태용을 만나봐라" 로 바뀌었다.
대충 가장자리에 고장난 스탠드처럼 서서 맥주 한 병을 들고 홀짝거리던 태용이 눈치를 보며 서있다가 요란한 공간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유타 역시 얼른 그 뒤를 따랐다. 태용이 터덜거리며 신발 밑창을 끄는 소리가벽 반대편에서 어지럽게 들리는 파티 분위기 위를 가로질렀다. 라이브홀 화장실은 전구를 갈아끼울 노력조차 하지 않는 듯한 공간이었다.
"약이라도 하러온줄."
"어 유타.."
"몰래 나가길래."
"아 그런거 아냐."
"아쉽네."
영양가 없는 대화가 타일 사이사이를 웅웅거리며 부딪쳤다. 잠깐의 침묵 후 유타가 입을 열었다.
"...태용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무엇에 대해 묻는지 구체화할 필요도 없었다. 그도 시끌벅적한 내내 유타의 까만 눈동자가 누구를 향해 계속 추파를 던지는지 보고있었으니까.
거울속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대부분의 경우 태용이 먼저 눈을 피했으나 이번엔 넋놓고 유타에게 고정되어있었다. 태용은 말하고싶었다. 그만좀 심술부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내 관심이 꺼져버린 유타가 먼저 손을 대충 털면서 등을 돌렸다.
한참동안 태용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다들 저마다의 흥에 취해 드러머 한 명의 부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유타 역시 어둠 속에서 보이던 태용의 불안한 표정에 대해 금방 잊고 화제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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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상쾌한 햇살을 거부하기 위해 암막커튼을 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타에게 오후 두 시를 알린 것은 아이폰의 미약한 진동이였다. 그 전날 밤 유타와 함께 했던 태용의 데이트상대가 전화를 받으라며 재촉했다. 이 때가 퍼블리싱매니저 존으로 부터 '태용이 사라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이다.
'잠깐 어디 갔을 수도 있지.'
생각도 잠시 얼마 후 유타는 항상 입던 후드 주머니 깊이 주먹을 찔러넣었다가 낯선 질감에 손을 끄집어낸다. 작은 포스트잇이 딸려나왔고 끈끈이가 있었을 위치엔 주머니의 먼지따위가 잔뜩 묻어서 제 기능을 하지 않았다. 가끔 보던 태용의 손글씨였다. 유타는 존을 부르기 전에 재차 쪽지를 읽었다.
"..찾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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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태용을 찾은 것은 몇 주 후였다. 유타는 가사 세 토막 정도를 썼고 멜로디 몇 개를 기록했다. 유타 주변인 그 누구도 태용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다. 태용의 행방에 힌트를 준 것은 종종 만나던 태용의 예전 연인이었다.
"아..재활을 해?"
바이크는 필요이상으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락스타다운 짓은 자기 혼자 먼저 하고. 어쩌면 어울릴지도.. 유타는 태용과 그의 동생을 떠올렸다. 동생이 무슨 키 작은 미국인의 love yourself라는 노래를 듣는 동안 태용은 옆에서 이어폰을 꽂고 너바나의 I hate myself and want to die를 듣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타는 방문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나카모토. 이 성을 좋아했던 락밴드의 드러머 누군가가 생각이 났는데.
태용의 방은 2층이였다. 걘 뛰어내리면 안된다구요. 긴장한 입끝을 숨기느라 아무렇게나 던진 농담에 접수대 안에 서있는 상대는 웃지 않았다.
꽤 많은 절차때문에 유타는 잠시 그가 자신의 정성을 테스트하려고 일부러 이 안에 들어온건 아닐까하는 상상을 했다.
결국 마주한 드러머의 얼굴은 평소 보던 것 보다도 헬쓱해져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었다. 벽도 침대도 그가 입고있는 옷도 부슬거리는 머리카락도 전부 하얀색이라 더 그래보였다.
"태용아 죽으면 안돼."
"유타야..."
태용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낯선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단번에 유타가 향수를 바꿨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타는 상대가 말을 끝맺을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고개를 기울여 바라봤다. 태용은 유타를 마주보지 않았다.
"...니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유치하게 굴지마 태용."
유치하게 굴지마. 말문이 막혀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태용이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유치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말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한 본인을 깨달았을 때 느껴진 것은 절망뿐이었다.
"유타야. 난 정말... 못하겠다."
"밴드를?"
"너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묻는거 그거 그만해야돼."
여전히 시선은 자신의 발 끝에 박힌채였다. 태용은 직전에 뱉은 자신의 말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래 그럼 사귈까?"
태용이 작게 욕했다.
"그따위 대답 하라는거 아니야."
"일본어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네."
시간이 지나면 풍화될 애매한 감정을 왜 털어놓았는지. 약기운과 답답한 블라인드 탓을 했다.
침대가 푹신하다며 그대로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댄 유타가 낯선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지금 작업중인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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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투어는 태용 없이 드럼 세션과 함께 진행됐다.
그래서 그 감정은 시간에 따라서 점점 잊혀지고 빛바래져갔나?
어느 늦여름, 태용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저절로 깎여나갈 것이 아니라며.
유타는 가끔 뒤를 돌았을 때 태용을 생각했다. 뒤 돌 때마다 정면에서 부서져라 드럼을 내리치고 있던 드러머. 세션이 무슨 문제 있냐며 일어났다.
"어 아니 문제 없어. 계속 해.